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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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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계의 대부, 조지A. 로메로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에 대해 나무 위키에서 검색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제작비는 11만 4천 달러인데 전세계적으로 3천만 달러가 넘게 흥행' '각본가인 루소가 이 제목 판권을 가지고 있기에 이후 속편이 살아있는~이란 제목을 빼버리고 그냥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낮으로 나오게 된 것' '개혁파, 보수파, 흑백갈등, 반공 이데올로기, 베트남전등 당시 미국에 있던 모든 갈등상황을 극적인 상황에서 담아낸 것으로 대단한 작품' 등등. 반 세기 전의 흑백영화를 보는 게 부담스럽다면 위키에 등록된 해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사에 최초로 등장한 식인좀비. 그 설정의 그로테스크함에 비해 표정과 몸짓이 다소 귀엽다.


좀비라는 용어는 이 영화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영화 이전의 좀비는 부두교에서 유래한 되살아난 시체, 또는 약물과 최면으로 자아가 사라진 사람으로서 주로 육체노동과 심부름을 대신하는 역할로 비쳐졌다. 앞서 '화이트좀비(1932)'와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에서 좀비는 주술사에 복종하는 자아가 없는 노예로 그려졌다(그래서 주로 흑인으로 묘사된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식인 시체들의 이미지는 오히려 '지구 최후의 사나이', '신체강탈자' 등의 세기말적인 SF영화에서 차용한 것이었으며 감독은 식인시체들을 '구울'이라고 부르려고 했단다. 그러나 팬들이 먼저 이 영화의 시체들을 좀비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속편 말미에 최초로 좀비라는 대사가 언급되었다. 시체들의 새벽은 쇼핑몰에 우글거리는 좀비의 이미지가 기존 부두교식 좀비의 이미지를 치환하며 인종적인 노예에서 자본적인 노예로 문제의식이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월이 흐르며 노예제도는 폐지되고 인종갈등도 개선의 양상을 보여주었으나 자본주의는 걷잡을 수 없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좀비가 초현실을 넘어 '재앙'으로 묘사된 까닭이 이런 문제의식에 있는 것이다. 팬들의 이해를 감독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케이스가 아닐까.


전설적인 '시체' 시리즈 이후 로메로 감독은 기가 한 풀 꺾인 모습이다. 2000년대 이후로는 28일후와 새벽의 저주 등을 필두로 급변한 좀비 트렌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며 이도저도 아닌 평이한 영화들을 내놓는데 그쳤다. 연달아 팬들을 실망시키며 전설적인 호러의 거장이라는 타이틀도 간당간당해졌다. 감독이 죽을 쓰든 어쩌든(메이저 감독 중에 그런 케이스는 생각보다 많다) 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호러 장르의 클래식으로 영화사에 남아 있다. 공포영화에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있다면 바로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봐도 봐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 집이 그렇게 맛있다며



양보할 수 없는 맛!





최초의 좀비들은 하는 짓이 귀엽다. 아닌게 아니라 좀비 역할의 엑스트라들을 주로 지인들과 이웃에게 부탁해 무보수로 맡겼다고 하니 요즘 좀비에 비하면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장례를 앞두고 있던 시체들이라 신체훼손이 심하지 않으며 죽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눈을 부릅뜨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 뿐인 요즘 좀비들은 얼마나 몰개성한가?



범람하는 좀비영화에 신물이 난다면 썩은 피 대신 초코 시럽을 묻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최초의 좀비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재 저작권이 소멸되어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귀엽다고는 했지만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 중엔 평생 트라우마로 남은 경우가 꽤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령별 등급제가 없어서 성인영화고 만화영화고 구분 없이 전 연령이 관람할 수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정도의 익살맞은 이야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어린이들 앞에 한 시간 반 동안 펼쳐진 영화는 되살아난 시체가 내장을 파먹고, 밀폐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선하고 영웅적인 등장인물들은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끝내 절망과 우울로 가득찬 배드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일종의 정신공격이었다. 극장 매너 때문에 도망쳐나오지도 못하고 많은 아이들이 숨을 헐떡이며 세계 최초의 좀비영화를 보았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아마 요즘 이런 헤프닝이 일어났다면 여기저기서 고소하고 고소당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평론가들도 영화 자체에는 호평을 아끼지 않는 한편 이 영화가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굉장히 우려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이 영화에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인공 년이 사람 암 걸리게 답답하다는 정도이다. 연기를 못 하는 까닭도 있지만 캐릭터 자체가 다른 이에게 항암제를 강권하는 물쓰레기 같은 년이다. 90년에 리메이크 된 버전에서는 이 년이 버전업되어 보다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하는데, 그 외엔 거의 같은 내용이니 컬러 버젼을 보고 싶다면 리메이크 버전을 추천한다(엔딩은 다르다).



주인공 형님의 활약을 지켜보며 글을 맺는다.



그의 앞에서 눈을 안 깔면



요렇게




죽는다




뷔폐 개업 소식에 헐래벌떡 찾아온 손님도




죽.인.다





상황 파악 못 하고 어슬렁거리면





죽.인.다




좀 친해졌다고 깝치지 마라.





죽.인.다




눈 깔고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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