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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일기

투쟁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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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노조원이 홀로 쿠팡 물류센터 앞에서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노조와 시위라는 조합에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는 평화로웠고, 놀랄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근무환경은 썩 나쁘지 않았다. 언성을 높여가며 일용직의 자존감을 짓밟는 관리자도 없었고, 노동강도는 쉬엄쉬엄 산책하는 수준이다. 성수기에나 드문드문 있는 잔업은 겨우 30분에 불과했다. 그만큼 급여는 적지만, 이미 급여 수준을 알고 제발로 걸어들어온 사람들이니 불만이 있을 여지가 없다.
그럭저럭 사는 데 이만한 직장이 있을까 싶다. 그걸 아는 건지 노조는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른 센터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를 조근조근 읊을 뿐이었다.

80년대 운동권을 연상시키는 전투적인 노래가 적절한 음량으로 흘러나왔다. 마찰이나 갈등이랄 것도 없고 참으로 일상의 한 부분 같은 투쟁이었다.

자연히 나의 망상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향해 흘렀다. 정육식당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해체된 고기 앞에서 추모를 하는 동물보호단체라든가(그들은 놀랍게도 각 부위마다 꽃을 놓으며 추모했다. 다리와 갈비와 뱃살에 각각 서로 다른 영혼이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하며 남성성이라는 악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매일 성난 불을 던지는 근래의 페미니즘이라든가. 그들의 투쟁에서 나는 아무런 감회도 느낀 적이 없다.

일찍이 투쟁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투쟁은 자연, 즉 죽음과 혼돈으로 향하는 엔트로피의 흐름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 결과 문명이 탄생했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건 인류 뿐인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인류는 인류에게 투쟁했다. 그 결과 봉건제와 제국주의가 무너졌다. 투쟁이 성공할 때마다 평균수명이 수직상승했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투쟁이라는 생존방식에 불순한 것들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울 필요 없는 대상과 싸우고 자신과 별 상관 없는 것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투쟁은 더 이상 절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생존이라는 명제에 비해 도덕적 우월감과 선민의식은 가볍고 허무할 뿐이다.

굳이 투쟁하지 않아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혹은 영원한 투쟁으로도 얻어낼 수 없는) 자질구레한 목표들이 피칠갑을 한 채 굴러다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막연히 어떤 음모 같은 것의 예감을 느낀다.

투쟁이 더 이상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얻어내지 못한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물론 물증 없이 망상을 펼치는 건 재미는 있지만 별 소득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음모는 제껴두고 다른 가능성에 대해 더 생각해본다. 어쩌면 문명은 투쟁 그 이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득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창 때 스무살 배기 전경들의 눈을 죽창으로 쑤셔대던 데모꾼들은 피가 짜게 식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점진적인 설득 말고는 답이 없다.

동물보호단체가 도축되는 소와 돼지의 개체수를 줄이고 싶다면 남의 영업장에서 생떼를 쓸 게 아니라 우선 소비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채소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들의 몸이 불쌍하다고 말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한식 등 채소 비중이 높은 아시아 음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문제는 비싸다는 거다. 채소 수요를 높이고 가격까지 안정시킬 수 있다면 육고기 수요는 자연스럽게 낮아질 것이다. 한 사람을 세뇌해 완전채식자를 만드는 것보다 여러 명이 고기 한 접시씩 덜 먹게 하는 게 난이도는 낮고 효율은 높다. 더군다나 라이프 스타일의 전염성을 감안하면, '내 건강과 외모를 위해 채소를 더 먹는다'는 개념은 역병처럼 빠르게 퍼질 것이다.

굳이 극혐 이미지를 뒤집어쓰지 않고도 시민의 건강에 기여하면서 동물의 권리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날이 성장하는 배양육 시장에 대한 후원 캠페인을 진행하면 어떨까? 별 투쟁 없이도 '제로 도축'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다시 내 안의 음모론자가 혀를 차며 끼어든다. 당연히 이득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 인권단체가 중국과 중동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투쟁이 생존이 아닌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생계로서의 투쟁은 절대로 절충안에 합의하지 않는다. 그래야 기업의 로비를 받아먹을 수 있다. 해양생태계가 환경단체의 묵인 아래 실시간으로 돌이킬 수 없이 조져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부르주아보다 나쁜 건 이렇게 대중의 눈과 귀를 흐려 정치적,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사이비 사상가들이다. 당장 죽창의 방향을 돌려 내부의 변절자를 색출하고 길로틴 위에 목을 눕혀야 하는다…!

워워 진정하라고, 망고써커. 나는 내면의 음모론자를 타일렀다.

분노로 바뀌는 건 없다. 그렇다고 절박함으로 호소하기엔, 세상이 이미 자극에 둔감해졌다.

당장 한국만 해도 군사정권과 imf 이후로 어지간한 위기는 무던히 넘겨 버린다. 심심하면 바다에 대고 뭘 자꾸 쏘는 북부 대공, '킴 디 엉클 슬레이어' 또한 우리의 불감증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온 나라가 현타에 빠진 시점이다. 우리는 위기감을 영영 잃어 버렸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차분한 대화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무사안일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웰빙과 쾌락으로 접근해야 한다.

존중과 공감은 일상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일종의 애무다. 프로 섹서는 전희에 공을 들이는 법이다. 심지어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다. 권장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시작하는 설득의 방법은 그 효용이 입증된지 수천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숙달된 사람이 드문 까닭은 이게 고도의 능지를 필요로 하는 기술이라 그렇다. 대체로 사람은 나보다 못난 사람을 헐뜯고 싶은 욕망에 너무나 쉽게 넘어간다.

바꿔 말하면,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공감 받고 이해되는 경험을 낯설어한다. 분노와 혐오와 증오 앞에서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사람들이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에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만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있을까?

그러므로 선동하고 혁명하려는 자들은 이제 투쟁을 넘어, 이해와 공감을 시작해야 한다. 전투적인 고전 사상서에 글 몇 줄로 박제된 '정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개인 내면의 복잡미묘한 행적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자주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대중'이라는 모델이니까.

과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솔직히 상상하기 쉽지 않다. 면 대 면의 문제가 이럴진데, 어떤 집단이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는 발상은 짐짓 허황되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아무도 안 하고 있다. 저마다의 이해관계, 즉 잠정이익을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에 매몰되어 정작 생존이 달린 절박한 목표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화와 공감의 시장은 그야말로 청정 블루오션 그 자체다. 다만 '이익'에서 '목표'로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굳이 거기 뛰어들 의욕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영 포티의 등쌀에 하는 둥 마는 둥 시늉이나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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