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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일기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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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쓰는 일'에 꽂혔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나도 한때는 글 쓰는 업을 가지려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다.
태초에 세상이 있고 그 안을 아직 덜 깎인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던 사춘기 소년이 있었다. 여러모로 불우하고 불운한 환경 탓에 소년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10대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인적 없는 축사 가설 건물에 갇혀 살며 소설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이 축사라는 표현은 은유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소를 가둬 기르는 곳에 조립식 주택을 이어붙인 모양이었다. 시내까지는 한 시간을 넘게 걸어야 했고, 근처에 이웃이라곤 낮 종일 소음을 쏟아내는 고철상(혹은 그 비슷한 업종) 사무실 하나 뿐이었다.
그 집의 채널이 몇 개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은 운이 좋달지, 외국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던 채널v와 mtv가 나왔다. 인터넷도 안 되는 그 축사에서 방영표 따위는 구할 길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타이밍이 맞기를 바라며 습관적으로 tv를 틀어 두 채널을 번갈아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다 더 바인즈 같은 호주 펑크 밴드, 슬립낫이나 머드바인 같은 미국식 땡깡 밴드의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넋을 잃고 몰입했다. 이 고립된 음악 취향은 훗날 초당 100kb도 안 나오는 인터넷이 연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운 좋게 신세계의 최신문물을 영접하는 순간은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우발적인 행운을 기다리는 동안 줄곧 책을 읽었다. 10대 특유의 치기로 이해하지도 못할 어려운 책에 달라붙었다가 패배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도서대여점에서 빌려온 판타지와 무협 소설을 읽을 때가 많았다.
그런 조야한 재미로 범벅이 된 글들을 읽다 보면 으레 이런 생각이 드는 법이다. “나도 써볼까?”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은 판타지 장르였다. 아무 기획도 없이 갑자기 떠오른 장면을 중간부터 써내려간 것이었는데, 이 습작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학교에 들고 간 것이 큰 화를 불렀다.
두 차례의 고난이 있었다.
하나는 일진놀이하던 동급생이 내 노트를 빼앗아들고 소리내어 읽으려 한 것이다. 나름 친분이 있음에도 나는 격노해서 달려들었으며, 그 친구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무례한 놈 같으니라고.
두 번째는 그 노트를 수업 중에 필기하는 척 들여다보다가 선생님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노트를 압수한 선생은 한두 페이지 훑어보더니 나는 절대로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 엄숙히 선언했다.
(어느 과목 교사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모든 교사가 그랬듯 그 낯선 어른은 내 인생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가 단지 나에게 그랬다는 사실만을 20년 넘게, 어쩌면 앞으로 평생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여기저기 숨어서 글을 찌끄렸다. 남들이 눈치채기 전에 써야 했으므로 짧은 글이 대부분이었다. 대체로 10대 특유의 정신발작 같은 단말마를 너저분하게 흘리고 다녔는데, 문창과를 지망하기로 결정하고 그 실기시험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정돈된 글을 연습하는 버릇이 들었다.
이후 서울의 유명한 사교육 기관에 아버지가 피땀 흘려 번 돈을 꼴아박아가면서 나는 뜻밖에도 운문의 재능을 발견했다.
중등 교사의 저주 탓에 소설 앞에만 서면 왠지 주눅들고 글이 헛도는 나였으나, 여기저기 숨어서 찔끔거리던 단말마들이 뜻밖에도 나름의 습작이 되었던 것이다. 산중 가설 건물에 갇혀 곪아가던 어린 정신은 기이하게도 진물 대신 시의 이미지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난히 운문으로 실기시험에 합격했으나, 그땐 이게 얼마나 멀리 돌아가는 길인지 몰랐다. 막연히 뭐든 열심히 하면 잘 하게 되고, 잘 하면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이 열리리라는 헛된 꿈에 단단히 취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려고 기를 쓰고 현실을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나이였으니까.
아무튼 철 없는 열아홉 대학생에게도 현실은 무섭게 제 생리를 다그쳐왔다. 돈 없어? 빽 없어? 그럼 공부와 노동을 병행해야지?
나는 산만하므로 그런 멀티테스킹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력화된다. 심지어 신입생 때는 아직 미성년자라 나를 알바로 써주는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거지꼴로 밥을 동냥하던 대학 생활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나는 슬금슬금 글 자체로부터 멀어졌다.
중등 교사의 저주에 내가 본격적으로 시달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너는 절대 작가가 되지 못할 거야.’

이 저주가 참을 수 없이 비열한 까닭은, 그게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등단에 성공해 한국소설가협회나 시인협회에 소속된 후 1년 내로 단행본 한 권을 허겁지겁 내놓아 연재 기회를 연장하는 것이고(등단 이후 이 과정을 소홀히 해 영원히 기회를 잃은 작가가 적지 않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런 자질구레한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오픈된 플랫폼에 소설을 연재해 대중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플랫폼과 수익모델이 제대로 형성된 것이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즉, 스무 살의 내 앞에는 등단 아니면 막노동 두 갈래 길밖에 없었다.
그땐 많은 글쟁이가 그랬다. 그래서 몇 년도 우습고 10년이 넘도록 작가를 지망하는 아마추어 신세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지금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런 처지에 중등 교사가 내린 저주는 얼마나 가혹한가?
아무리 노력하고 매달려도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라니!
노가다와 글쓰기를 병행하다가 마음이 꺾인 까닭에도 이 선언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참 고오맙소, 선생.
어쨌거나 꺾은 마음을 오래 방치하다 보니 세상이 변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새 다 바꿔놓았다.
등단으로 이어진 지난하고 가난한 고통의 길을 굳이 부러 걷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웹소설은 이미 네이버와 카카오 등 메이저 플랫폼의 캐시카우 취급을 받고 있었고, 작가들의 수익모델 또한 출판시장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후한 공식이 굳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르 작가, 특히 웹소설 작가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출판의 악마들이 e북도 북이라며 그야말로 이북에서나 통할 논리를 앞세워 도서정가제의 마수를 뻗쳐오곤 하지만, 웹소설 작가들은 꿈쩍도 않고 그들이 세운 도시를 지켜냈다.
막말로 현대 미술 갤러리들이 만화 시장에 개입하던가? 클래식 연주자들이 가요 세션들의 정산 구조에 대해 왈가왈부하던가? 웹툰과 웹소설에 도서정가제라니,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발상이다.
그리하여 그쪽 세상을 대강 알게 된 요 몇 년 사이 나는 글을 업으로 삼아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밥 벌어먹는 삶을 다시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된 저주 탓일까, 아니면 그날 벌어 하루이틀 대충 생활을 풀칠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나는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시도는 잦았으나 그만큼 자주 중단되었고, 단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30대가 꺾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얼굴 없는 중등 교사가 발록 앞의 간달프마냥 “너는! 절대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꾸짖고 있었다.
정말 그런가?
지난 날을 돌이켜본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첫째. 글은 잘못이 없다. 글은 결코 인생을 좀먹는 곰팡이균 같은 게 아니다. 글쓰기는 단 한 번도 내 인생을 해코지한 적이 없다.
둘째. 내 재능도 잘못이 없다. 각 잡고 쓴 글은 또래에게 늘 재밌다, 잘 썼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창 블로그를 열심히 운영할 땐 내 글을 기다리는 고정 독자마저 있었다. 그 중엔 직접 만남을 청한 사람도 몇 있었고, 또 그 중엔 실수처럼 하룻밤씩을 훔쳐간 여자도 두엇 있었다. 호기심을 채우고 나면 하나같이 슬그머니 멀어지긴 했지만, 뭐 이제와서 밉거나 아쉬운 건 없다. 바이바이.
아무튼 세상 천지에 누가 오직 글만 가지고 생면부지의 이성을 홀릴 수 있겠는가?
그 시절 나에게는 다 큰 성인에게 중2병을 감염시키는 요사하고 사특한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 퇴폐적이고 어두컴컴한 마력은 재능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여기까지 인정하고 나면 나는 뼈아픈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문제는 글을 쓰는 내 태도에 있었다.
중등 교사의 선언 이후 나는 남이 보기에 그럴싸한 글을 쓰려 했지, 재미있는 글을 쓰려 한 적이 없었다.
부정적인 비판에는 늘 변명거리를 준비해 놓았다.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네가 눈여겨보지 못한 이 문장의 이미지는, 운문 전공으로서 내가 핵심 시어 즉 푼크툼으로 의도한 이 단어가 가리키는 지점은 결코 드러날 수 없는 내적 공간을 안개처럼 희부옇게 유영하는 멜랑꼴리한 정서의 근원이 되는 내밀한 기억의 메아리치는 잔상, 그 중에도 가장 어둡고 수치스러운 본능의 그림자 의식이며 예기치 못한 순간 의식의 표면에 송곳처럼 불쑥 불거지는 섬뜩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원망의 표상인데 그런 내 글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서 미치고 팔짝 뛰것다!
대학 시절 나는 이런 영문 모를 소리를 영원히 떠들어대서 비평하려는 상대를 지치게 하곤 했는데, 이런 식의 변명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야말로 뭔가 있어 보이게 써야 했다. 그러나 잡다한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보면 그 실상은 모호한 이미지로 겹겹이 위장한 자기연민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 공허한 미로를 골똘히 읽어주는 이가 없으면(과제나 수업이 아니면 누가 그 고난을 자처하겠나) 나의 글쓰기는 처음부터 성립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감평 시간을 학수고대하던 어린 놈의 나란 놈은 대학을 벗어나자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 잘 쓰는 짓인지 갈피를 잃어버렸다.
아아. 재능이란 달콤한 유혹에 속아 머나먼 운문의 길을 돌아온 끝에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시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시에 헌신하긴 커녕 그 앞에서 진솔했던 적조차 없으므로.
스스로의 영혼을 착즙하여 독약처럼 짧은 문장을 방울 방울 내어놓은 진짜배기 시집들 앞에서 나는 습작 노트를 들킨 중학생 때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서점 한켠의 서정시 코너는 항상 나를 엄숙하게 꾸짖는다. ‘할 마음도 없으면서 기웃거리지 말라!’
그래도 그런 꾸짖음은 저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죄책감을 타이르는 상냥한 종류의 훈육이다. 나는 여전히 잊을만하면 책장에서 아무 시집이나 꺼내들고 몽상에 잠긴다. 적어도 일 년에 한번쯤은 그런다. 그보다 적은 빈도로 시를 쓰기도 했으며, 그것들은 아무래도 책상 서랍 혹은 구글 드라이브에 혼자 간직할 수밖에 없는 지나치게 솔직한 문장들이다.
다시 돌아와서, 글뭉치를 돈뭉치로 뒤바꾸는 연금술사가 되고 싶은 나에게 운문의 여정은 치명적인 습관들을 남겼다. A4 한두 장 정도의 글을 영원히 들여다보며 고쳐쓰는 버릇이 바로 그 중 하나다.
두 시간 동안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벼락 같은 깨달음에 몸서리친 뒤, 떨리는 손으로 조사 한 글자를 바꿔적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무릇 영혼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언어는 ‘나'의 일부분이다. 이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 수박도에 그려져 있다.
내 영혼이란 말이다. 깨끗이 씻어 곱게 차려입혀야 비로소 남에게 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나 같은 사람들에게 퇴고란 인플루언서의 틱톡 필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연재되는 작금의 웹소설들에서 적나라한 비문과 오탈자를 발견하면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런 단정치 못한 치부를 거리낌 없이 내보이다니!
심지어 어떤 웹소설은 읽는 것만으로도 집필 과정이 선명히 그려지기도 한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건 너무…너무 너무 야하다.
생방송에서 아슬아슬한 복장으로 아슬아슬한 춤을 추는 여캠 bj들과 비축분이 떨어진 웹소설 작가의 라이브 연재는 섬뜩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이 아찔함을 스스로 어쩌지 못하면 내가 직업적으로 웹소설을 연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여캠 bj들의 착장 속에 숨겨진 은밀한 안전장치들처럼, 웹소설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루틴으로 자기 글의 급소를 지켜내는 듯하다.
그런 것들을 흘끔거리고 몰래 연습하면 언젠가 나도 글로 제로투 댄스를 출 수 있지 않을까?
이 고민은 아직 한참 시기상조다. 초심자가 보디 빌더의 빤스 차림을 보고 쇠 들기를 주저하는 꼴이다. 다만, 여차하면 발가벗고 무대 위에 오를 결심을 미리 해보는 데 의의를 두자.
마인드셋을 그렇게 고쳐먹은 뒤엔 현재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나는 현재 일 주일에 1000글자도 쓰지 않고, 그나마도 루틴이랄 것도 없이 불규칙하게 쓰고 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규칙적으로 많이 쓴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헤엄을 친다는 말 같다.
과연 나는 ‘규칙적으로 많이 쓴다’는 필요충분조건을 체화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시 기억을 거슬러 내가 가장 많이 글을 썼던 열아홉, 스무 살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나는 데스크탑이 없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다. 20만원 조금 넘었던 넷북(반짝 인기 끌고 사라진, 태블릿과 노트북의 중간 형태의 기기다)이 내 디지털 자산의 전부였으므로, 나는 대체로 10대 시절 내내 그랬듯 아무 종이에나 대고 펜으로 글을 갈겨 적었다. 줄을 바꾸느라 글 쓰는 손이 멈추는 게 싫어 이면지를 돌려가며 소용돌이처럼 쓰는 짓도 자주 했다. 이러면 한 장을 다 채울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쓸 수 있었다. 글자까지 깨알처럼 작게 쓰면 종이 한 장으로 몇 시간이고 재미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손글씨들의 구불구불한 회오리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쓸만한 문장을 추려서 타이핑했다. 여기까지가 초고 작업이다. 수율은 대강 5000~6000글자를 써서 시 한 연을 건지는 식이었으니(아아 운문이여) 비효율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짓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던 까닭은 당연히 재미다.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글은 쓸수록 는다. 특히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확확 는다. 이게 게임 레벨업하는 맹키로 굉장히 재미있었다. 멀티 태스킹이 불가능한 대신 하나 꽂히면 그것만 붙들고 사는 성격이라 앉아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보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그랬던 것 같다.
그 결과 이렇게 멋진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하는 이야기면 참으로 흐뭇하련만.
어쨌든 그때의 재미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앞서 말한 필요충분조건이 영 허황된 일은 아닐 것이다.
올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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