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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일기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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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관계와 친구 사이, 즉 사랑과 우정을 철저히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늘 누군가 자신을 욕망하기를 원한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 비난하려고 서두로 꺼내든 것도 아니다. 내 경우와 너무 달라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편안하고 끈끈한 정을 선호한다. 그래서 연인과 사이가 깊어지면 얼마간의 의리와 우정을 요구하는데, 이에 질색하는 여자들이 많다.

반대로 설레임에 중독되어 수시로 연인을 갈아치우는 사람을 보면 나는 눈앞이 아찔해져 마음의 안전거리를 500킬로미터 이상 확보한다.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위의 뷔폐식 찍먹 연애는 극단적인 예시다. 대다수 사람들의 사랑은 애틋함과 설레임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르고 있다.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오래될수록 전우애가 생긴다 하니, 나는 이미 늙었으며 열정적인 연애를 할 기력을 다 소진해버렸다 자인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연애를 시작한 스무 살 무렵부터 나는 크게 변한 바가 없다.

내 사랑이 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까닭은 내가 스스로 짐승임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몸뚱이의 피와 살에 얽매여 사는 동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리고 동물의 사랑은 아무래도 절차와 형식보다는 애틋함과 이타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짝을 지어 사는 다른 포유류의 사례를 보아도 이러한 감정의 형태는 대동소이하다.

젊은 나는 첫 사랑과 첫 연애의 통증 이후 스스로의 짐승됨을 빠르게 인정했다.

남들이 숨쉬듯 실천하는 사랑의 방식을 따라할 때마다 나는 어른을 눈대중으로 흉내내는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소한 손짓 하나 발짓 하나 야심차게 준비한 비장의 대사 한줄 무엇하나 호평받는 법이 없었다. 로맨티스트는 영 적성에 안 맞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쁘지 않게 타고난 마음을 치장한다는 것부터가 거슬리고 거북한 일이었다. 한번 세팅하면 반나절은 이어지는 외모와 달리 말과 행동은 온종일 매 순간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니까.

결국 나는 본래 타고난 대로 짐승처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가 돌연 내 앞에서 똥방구를 뀌는 사고가 벌어져도 나는 연인의 실추된 이미지에 실망하기보다 애틋한 마음으로 함께 팔을 휘적여 냄새를 흩어내곤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는 내게 가장 많은 흠을 보이고, 또 그만큼 내 흠을 봐주었던 이다.

연인의 외모에 익숙해지는 것을 흔히 콩깎지가 벗겨진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대신 다른 깎지가 씌어지는 듯했다. 그것은 짐승 특유의 애틋함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개나 고양이가 주인에게 드러내는 맹목적인 감정과도 유사하다. 애틋함은 욕망하는 일과 달라서 섹스가 끝났다고 시들해지는 법도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깊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연애 초반보다는 적어도 반 년 이상 만난 뒤에 더 열렬해지곤 했다.

사람이라는 짐승의 특징은 반려인, 가족과 평생 함께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일이 갈수록 힘겨워지는 시국임에도 이러한 본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평생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가볍게 만난 이에게는 함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정이 들기 전에 탈출한 적도 몇 차례 있다. 누군가는 나를 존나 나쁜 새끼로 기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쪽에선 남은 평생이 달린 일이니 나름 신중하게 내린 결단이었다. 애틋함에 불이 붙으면, 이후엔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테니까.

온종일 전화로 괴롭혀대면서도 내 이름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알콜중독자를 사랑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 역시 오랜만의 인연이 그런 식으로 결론지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다. 바이바이.

아무튼 의리와 우정이라는 그 땀내 나는 어감 때문에 극혐하는 사람이 많은데, 좀더 순화해서 말하면 이렇다. 서로에 대한 헌신. 정직함. 이런 단단한 기반 위에 애정을 쌓아올려보자는 것이다. 때때로 미운 감정이 들어도 시간을 들여 서로 맞춰가고, 지나서 보면 추억이 되는 사이가 되자는 것이다. 그렇게 늙도록 함께 살아보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반려인이 그렇다. 그럴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쓸데없이 마음을 쏟고 싶지 않다. 대체로 내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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